[윤봉길] 독립운동가 - 독립 위해 산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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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독립운동가 - 독립 위해 산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

by cozy corner 2018. 11. 26.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찾아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른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습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생사 옆에 서있는 매헌 윤봉길의사의 동상입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과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 채 만주로 떠났습니다. 이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였고,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을 하였으며, 만주에서는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과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습니다.



열 아홉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은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면서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점을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의열투쟁에 있어 뜻을 모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을 하며,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졌고 독립운동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대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29년에 접어들면서 농민계몽과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 가지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운동이 결국은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수는 없었으며,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 넣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막연하게나마 일제의 압박들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으로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에게 있어서 그 사랑은 곧 민족애를 뜻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서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서 안장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유언은 윤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후손들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피체된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후 윤봉길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에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이 되었고 25살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윤봉길 의사는 독립을 위해 산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유언은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의 민족애는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인 윤모순과 윤담에게 남긴 유서는 후에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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