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나는 우산을 꾹 눌러 쓰고 그대를
데릴러 가고 있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우산 손잡이에서 깊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마지못해 손을 어루만줘졌다. 내 마음은 이미 갈 곳을 잃었고, 그대를 향한 뜨거웠던 사랑은 점차 식어갔다. 이 마음을 알런지 자꾸만 그대의 행동이 내 가슴을 미워지게했다. 그날따라 날씨는 찬란했고 내 마음은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싶은 고독에 빠졌다. 내 나이 22살, 사랑에 빠졌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24살인 나보다 2살 연상이었다. 그녀는 툭 하면 나를 불러내었고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못다한 이야기를 꺼내왔다. 우리는 그로부터 1년 뒤,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다. 그동안의 정도 있고 서로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도 함께 나누며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나는 거리낌없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커져만 갔다.
2.
내 나이 23살, 그녀는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왜 우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깊게 생각을 해봤는데 너랑 이렇게 지내는 게 나에게는 친한 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여자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아직 미성숙해서 그녀의 가슴속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나 같은 걸 믿고 지금까지 좋아해줘서 고마워"라며 나는 예상치 못한 작별인사만을 남기게 되었다. 그녀는 이별을 예고해서 말한게 아니듯이 나의 눈을 보지도 못한 채 끝내 마음을 떠났다.
3.
나는 그간 해오던 일이 있었기에 일에만 매진했다. 그녀의 대한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이별에 가슴이 메워져 오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이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던 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뿐인데 그간 1년 간 정을 쌓던 우리의 관계는 한 순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지만 정말 그녀가 나에게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나에겐 추억만이 남아있는 아련한 사랑이었고 애틋한 사랑이었다. 정작 나도 이런데 그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일에 매진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한 동안 깨어나지 않고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때마다 깊은 잠에 빠져 얼굴도 희미해진 그녀의 실루엣만이 꿈에 나온다. 그 날처럼 손을 어루만지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곤 했다.
4.
필름이 끊긴 오후, 일어나 속을 달랠겸 물 한 잔을 마셨다. 그 날 따라 빈 공간에 혼자 놓여진 외로운 사람이랄까. 이제 그녀에 관한 추억도, 기억도, 이제는 희미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개팅을 해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부탁에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줬다. 여느 때와 같이 말끔한 옷차림에 섬세한 향수, 더 잘생겨질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다듬고 소개팅 자리에 나섰다. 어느 한적한 카페에 거의 도착할 때 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이건 깜빡하고 얘기를 못했는데 너보다 2살 많은 연상이시다."라며 소개팅 잘해보라고 말하고 끊어버렸다. 친구놈은 항상 늦는 타입이다. 다행히 아직 카페를 들어가기 전 입구, 이제 곧 들어간다.
5.
아직 안 오신 모양이다. 먼저 주문을 한 뒤,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10분이 지났는지 저 멀리서 구두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상대는 선글라스를 썼지만 예의를 갖춘 옷차림이었다. 나보다 2살 더 많은 연상이라 그런지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카페 안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낯이 익는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라고 내가 먼저 물어봤다. 그녀는 "전..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한 그녀의 모습에 낯이 익은 건 분명했다.
6.
카페를 벗어나서 우리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그녀에게 배려를 해줬다. 그녀도 나름 나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듯 하다. 우리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어색했던 공기는 모두 빠져나오고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22살 때, 그녀와 사랑에 빠졌었던 그 날들이 이제는 허물이 벗겨져 녹슨 철과도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나는 소개팅녀가 그녀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나와 다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처음 만난 자리지만 어쩐지 내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순간 지난날들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녀와 다시 만났다.
7.
그녀와 나는 다시 무거워진 공기를 가다듬고 지난날의 과거를 야기하며 그간 묻고 싶었던 질문을 막 던지기 시작했다. "누나가 진짜 하려던 말은 뭐였어?"라며 나는 속에 있던 말들을 그녀 앞에 꺼낼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왜냐면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거든." 그녀의 속삭임에 나는 다시 예전처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나는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게 아닌데 내가 헤어지자는 소리를 한 것 같아 그 뒤로 연락을 안한거야?"라며 되물었다. "아니, 나는 너에게 수도 없이 기회를 줬는데 네가 그 기회를 져버렸어..사실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해도 될까?"라며 나에게 진중하게 되물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해? 그때 우린 비가 오던 날 네가 우산을 씌워줘서 편하게 집에 갔었거든. 내가 너 맘에 들어서 번호도 물어봤잖아. 냉큼 번호를 주더니 '누나 연락하세요'라며 나에게 웃어줬던 너의 그 미소가 내 마음을 흔들어놨었어. 우리는 참 짧고도 긴 연애를 했지. 그 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아니었나봐. 난 너한테 사랑을 갈구했는지 너의 표정을 보니 근심과 걱정이 가득찬게 눈에 보였거든. 그때는 내가 좀 미안했어."라며 그녀의 속마음을 내게 털어놓았다.
8.
지난날의 우리의 사랑은 뜨겁고도 열정적이었다. 남들 눈에는 힘 빠지고 시시한 사랑이야기로 보일진 몰라도 그때의 나에게 있어서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끝맺히고 서로에 대해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우리는 예전처럼 뜨거운 사랑을 갈구할만큼 한가하지 않았기에 서로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풀었고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진 관계를 형성했다. 정말 어쩌면 우리는 편한 사랑을 갈구했는지 모르겠다. 애써서 사랑하지 않아도 곁에 남게될 사람은 남게 되어있거늘. 조금만 더 서로를 이해했더라면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금방 식진 않았을 것이다.
9.
이제는 그녀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만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상대가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한 동안 잊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게 곧 내 마음이 되었을 줄은.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우산 손잡이에서 깊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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